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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항해하는

 

김노암

 

세상은 얼마나 복잡해졌던가. 오늘날 회화는 미술의 한 부분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총체적 시각에서 회화의 스펙트럼을 살펴보아야 그 대략의 모습을 인지할 수 있다. 회화는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그리고 다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응축하고 펼쳐지는 파동을 닮은 운동을 반복한다. 예술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표현해내기에 우리의 생활 감각과 평균적 일상은 더 복잡하고 더 혼란스러워졌다. 예술가들의 마음의 평정을 통해 놀라운 통찰과 상상의 이미지로 충만한 영감을 기대하지만, 그 기대가 충족될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지난 시기 수많은 예술가들과 예술애호가들이 희망을 놓지 않고 새로운 예술적 창의와 경험을 꿈꾸어 왔다. 우리가 오늘날 현대예술에 기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회화의 전체 상을 드러내기에 한 사람의 일생은 너무도 짧다. 회화의 비밀은 다수의 예술가 공동체의 치열한 경쟁과 협력, 우정과 배려 그리고 오랜 시간 세대와 세대를 지나 조금씩 드러났다. 회화는 인류의 탄생과 기원을 함께 하면서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담아낸다. 가장 오래된 암각화의 이미지나 최근 창작된 현대 회화도 시간의 간극을 넘어선 어떤 공통된 태도, 양상, 가치의 지향을 내포하고 있다. 회화는 시시각각 변해왔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의 복합체로서 고유한 정보와 문화를 함축해 왔다. 문인과 무인, 지식인과 무지렁이의 정신이, 시인의 마음과 사냥꾼의 섬세함과 농사꾼의 강건함이 서로 삼투하며 발현된다. 회화는 한편으로는 고결하고 우아한 아우라를 느끼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이며 감각적인 쾌감을 한껏 채워주기도 한다. 시대와 지역, 회화의 역사에서 감정과 이성의 오르내림과 얽힘으로 티 없이 맑은 정서와 무시무시한 감정의 폭풍이 벌어졌다. 우리는 개개인의 열망과 헌신으로 성취해낸 깊고 섬세한 회화의 세계를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리고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질 사건과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화가는 즐겁게 인류의 망각의 세계로 성큼 들어설 것이다. 

 

상(이미지)은 무한과 유한 사이에서 맺힌다. 그것이 존재의 차이든 운동의 차이든, 바로 그 차이에 의해 간격과 경계가 뚜렷해지고 그 사이에서 얼룩이 맺힌다. 무한과 유한을 모두 품으려는 화가들은 부단히 그 경계를 모색하고 확인한다. 회화 이미지 또는 회화적 형태란 경계의 유무에 기대어 안과 밖 사이에서 자신의 꼴을 갖춘다. 전체와 부분이 서로 조응하며 미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상고시대부터 음영과 채색과 형태를 골몰해 온 이래, 한 명의 작가는 인류 전체의 기억과 세계상을 홀로그램처럼 반영하는 전체이자 동시에 부분이 되었다. 사냥꾼의 세계와 농사꾼의 세계 속에서 별에 홀린 꿈꾸는 자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시적 의식으로 혼융되었다. 

 

회화 이미지가 지향하는 점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는 있으나 거기에 다가갈 수는 없다. 마치 하늘에 박힌 별처럼 눈에는 분명하게 감각되지만 그것에 다가가려면 이미 지나가버린 또는 앞으로 지나보내야할 억겁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유한한 점은 사실은 무한을 담고 있다. 그 무한은 또 다른 무한을 담고 있다. 우리의 상상은 무한과 유한 사이를 자유롭게 왕복한다. 유한과 무한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경계의 유무의 문제이다. 따라서 무한을 품은 유한이나 무한의 계열을 품은 무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회화 이미지를 형성하는 다양한 형태와 음영과 색면에는 무한과 유한이 혼재되어 있다. 무한한 점을 품은 유한한 선들과 무한한 선들을 품은 면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회화 작품 속에는 인류가 경험해온 수많은 경험과 시간성을 담고 있다. 영원의 시작과 끝은 찰나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하나의 회화를 보며 수많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유한과 무한의 운동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상상력과 새로운 경험을 향한 열망을 지녀야 하지만 말이다. 

제 9회 종근당 예술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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