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와 삶이 춤추는 시간_종근당예술지상 역대 선정작가전
회화와 삶이 춤추는 시간
김노암
회화는 자유로운 세계를 향한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창조한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치열하게 각고의 노력과 열정을 동반하는 이 운동을 멀리서 보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시공을 넘나들고 이미지들이 넘나드는 춤이다. 회화는 신이 추는 춤을 모방한다. 우주의 춤은 세계의 섭리를 따르는데 그것은 곧 생사를 초월한 자유와 더불어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체험과 미묘한 또는 미스테리한 사건을 둘러싼 경이로운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과정에 형성되고 사라지는 환상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려간다. 디지털 이미지와 AI 시대에 전통적인 그리고 전형적인 회화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 현대미술에서 회화는 변화와 확장을 지속해왔다. 2012년 출범한 종근당 예술지상은 한국의 회화작가들을 지원하고 응원해왔다. 작가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현대 회화의 개념과 형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그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종근당 예술지상 역대선정작가전에 초대된 15인의 작가들의 회화작품을 통해 우리는 확장된 의미에서 회화에 대한 관점이 변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들의 회화 속에서 드로잉과 오브제와 콜라주와 아상블라주가 결합한다. 동시에 신체 행위를 통해 응축되고 확산하는 복잡하며 섬세한 형식과 표현이 회화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변화되어 왔는지 보여준다. 회화에 깊이 다가가는 것은 그 만큼 일상의 평범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사람들이 동의하는 보편적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내면에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만큼 평범한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생활 세계와 사회 현실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게 된다. 회화를 통로로 삼아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기존의 관습과 선입견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다.
김광규 시인은 그의 시론에서 ‘언어는 불충분한 소리의 옷’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화, 회화이미지가 그 불충분한 언어가 지닌 결핍을 채워준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운다는 차원을 벗어난 미답의 영역으로 우리의 눈길을 돌리도록 하는 계기를 준다는 의미이다. 내 뜻대로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무언가에 홀려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옷을 입는다.
회화에 대해 우리가 인정하는 미적 보편성이란, 의미의 보편성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의 보편성을 뜻한다. 여기서 존재의 차원이란 언어와 개념의 논리의 차원을 벗어나 있으며 이는 작가와 작품의 일생(역사)을 통해서 필연과 우연의 관계 속에 드러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이는 세계관이나 인생관 또는 광의의 예술관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작가들마다 그리고 관객들마다 회화를 둘러싸고 미술사적 또는 미학적 결론이나 주제, 의미로 수렴하여 상호 동의를 끌어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의 작품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회화에서 우리가 모색하는 회화의 미적 차원에 대한 시각과 태도는 작가 자신이 설정한 목표나 의미 그리고 행위를 벗어나 또다른 영역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다. 작가가 캔버스 앞에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자유의 영역을 관객들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자코메티가 중력의 끝단까지 하강하거나 브랑쿠시가 천공의 꼭지까지 상승하는 경험처럼.
어슴푸레한 석양의 빛이 내려앉는 시간, 어둠이 사로잡는 베를린의 골목길을 걷는 어린 시절의 발터 벤야민의 체험을 통해. 그와 비슷한 체험을 통해 우리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환영과 환상을 경험해 왔다. 세대마다 경험하는 구체적인 조건은 다르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의식, 의미의 세계를 구성하고 확장하는 힘을 어디에서 얻는 것일까?
회화의 역사는 여전히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인간의 상상력과 이미지를 대체할지라도 회화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야 말로 가장 미스테리하며 거대한 신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기술과 과학, 지식과 정보가 인간의 감정,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오래된 미디어로서 회화가 여전히 미술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이번 종근당예술지상 역대선정작가전에 초대된 15인의 작가들에게서 회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