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실재의 창조와 해석과 치유
김노암
회화는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지만 이미 경험한 세계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정신은 회화의 미래나 비전보다는 오히려 회화를 처음 접한 오래전 과거로 날아가기 일쑤다. 우리 모두는 비상하는 정신과 감각을 채워줄 미술관과 세상을 순례하였고 수많은 과거의 대가들과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작품과 교감하며 더 높은 성숙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영혼의 여행이자 성장통이었다.
이런 경험은 원형적인 것이고 나이가 들어도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숨 쉬는 기억이 된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해서 환타지가 현실이 되고 시각적 현란함이 자연스러운 시대에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회화에 공감하며 반복해서 돌아가는 힘은 미래의 환타지가 아니라 과거의 환타지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엄마의 뱃속에서 보내던 가장 평온하고 조화로운 시절의 향수처럼 존재의 연속성이다.
새로운 매체가 범람하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회화는 아마도 가장 보수적인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회화에는 인류의 역사와 똑같은 정도의 시간과 역사가 있고 또한 그 만큼의 공통의 기억과 전통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오늘날 일반적인 회화의 관념을 형성한 것은 최근 100년간에 형성된 것이다. 현대예술을 이끈 회화의 모험은 이미 알려진바 인간의 발견이자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앎이었다. 자기 존재와 세계의 경계를 감각하고 인식하며 완전한 앎으로 만든 것에서 영웅적 근대 화가들과 그의 동료들이 성취한 것이다.
대중의 출현과 근대의 정신과 예술이 임종한 이후 회화는 점점 더 이상한 존재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예술가들은 그 불가능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고심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화가 다른 어떤 매체나 형식보다도 인간의 존재 문제와 가까이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주요 화가들의 관심사나 그들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를 둘러싼 이야기의 최종 국면이 매번 존재론의 문제로 귀결되어 버린다. 우리는 숨 쉬고 있으며 타자와 관계를 맺고 함께 공존하고 있음으로 해서 회화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의 새로운 모험가였던 백남준 또한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사실 그의 미디어 작품에는 수많은 드로잉과 회화가 스며있던 것이다.
회화는 어떤 기술적이거나 물리적이고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을 향한다. 그러므로 실상 우리가 미술관에서 만나는 대가들의 회화들은 관객을 향해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회화의 뒷모습이기 십상이다. 회화는 매번 등 돌린 채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기에 회화의 진짜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 우리가 회화라고 보았고, 보았다고 주장한 것은 회화의 얼굴이 아니라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뛰어난 이미지라 하더라도 결국엔 회화의 뒷모습이다. 천공의 별이 수백억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바로 지금 눈앞에 현현하듯, 에코의 소설에 나오는 전날의 섬처럼 바로 지척에 어제의 섬이 보이는 것처럼 회화의 이미지는 어떤 환타지를 현실로 우리 앞에 내어 놓는다.
이번 종근당예술지상에 선정된 윤상윤, 이우창, 이혜인의 회화는 이러한 회화의 본질적인 성격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한 작가들이다. 그들의 회화에서 우리의 마음에 어떤 가능성과 열림을 촉발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작가란 한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이자 타자인 것이다. 시장의 이데올로기와 각박한 전자계산의 세계에서 이토록 오래된 형식과 주제에 몰두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 많은 명멸한 예술가들 가운데 몇 명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또 얼마나 세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는가. 몇몇 예외적인 예술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예술가는 세계의 침묵과 마주한 삶을 마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