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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면서도 낯선 세계와의 조우

 

김노암

회화는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의 간극을 메우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는 형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 또는 관념의 문제와도 관련한다. 재료와 표현, 당대의 지배적인 정치경제적 상황, 과학기술, 종교와 이데올로기 등 작가가 살고 있는 사회 전체와 깊이 연결된다. 작가들은 작업의 형식적 특성과는 별개로 함축성과 다층성, 개방성과 확장성, 역동성과 항상성 등 다차원의 세계를 산다. 회화의 변화는 시대의식이나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정신을 예시하거나 재현하기도 한다.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하나의 시각에서 복수의 시각으로. 

 

작가든 관객이든 회화를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다. 모든 작가가 대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들의 시간은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흘러 미술계 또는 예술이라는 바다에 합류한다. 세계는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그 자체로 완전한 시스템이다. 다만 인간의 인식의 한계로 그것을 온전히 깨닫지 못할 뿐이다. 어떤 면에서 모든 작가는 작가의 길을 시작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완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창작 행위 또한 지각될 때에는 이미 하나의 세계로서 완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성장이란 이미 완성된 상태를 스스로 깨닫는 과정의 반복을 의미한다. 그것을 완전히 관통한다면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미스테리하게도 우리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서 구성된 회화를 통해 완전하고 평온하지만 동시에 격렬하고 낯선 세계와 조우한다. 

작가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회화 자체의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붙들고 있는 화두, 그 화두의 난해성 때문이다. 넓고 깊은 교양과 지식은 붓질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다. 작가는 점점 더 어려운 문제를 향해 날아간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난제와의 투쟁과 갈등은 재료들, 선과 면, 색과 붓질로 형상화 된다. 형상화의 과제는 작가들이 당면한 현실이자 일종의 출구이기도 하다. 문제를 그냥 놓아버리면 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니 난제이고 딜레마이다. 누구도 작가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작가는 강한 의지를 갖고 스스로의 눈과 손과 감정과 노동만으로 그려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한 작가가 마무리한 이미지는 경이로운 것이다.

 

한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안전한 길은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처럼 더듬거릴 뿐이다. 실상 무지의 영역에서 앎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작품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해석 또는 이상적 언어란 불가능하다. 하나의 회화는 어쩔 수 없이 작품 밖의 세계, 관계와 의미를 떠안는다. 한 작가의 이미지에는 그 작가의 의지나 그의 그림을 보는 관객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정치와 경제, 역사와 사회가 개입한다. 

종근당예술지상이 시작된 지 어느새 6년이 지났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세계를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어떤 작가는 미술계의 인지도를 획득했다. 그러나 작가들에게는 전과 다름없이 변함없는 창작의 시간이었다.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흐르고 사람의 마음과 표현도 변한다. 당장 어떤 결과를 도출하거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하는 창작과 전시는 무의미한 헛수고처럼 보인다. 회화에 몰입하는 것은 실용성의 욕망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상의 시간과 예술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그 간극 또한 거대해서 몇 십 년 전 또는 몇 백 년 전 제작된 작품이 오래 시간이 흐른 후 평가받는 예를 생각해보면, 그것을 단순히 헛수고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인식과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존재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제 4회 종근당 예술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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