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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다

김노암

 

예술가들이 펼치는 창작의 과정에서 외부로 확장하는 운동과 내부로 침잠하는 운동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와 방식의 창작의 모습이 있겠으나 우리가 피상적으로 접하는 작가의 상이란 모호하거나 복합적이다. 작가는 고립된 작업실에서 전력을 다한 총체적이며 집중적인 활동을 지속한다. 한편으로는 강박적이며 자폐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치지 않고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것은 탈속적인 활동이다. 내면을 향한 운동은 동시에 인간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안과 밖을 동시에 운동하는 창작자들의 창작 행위가 품고 있는 불가사의한 동시성은 근대의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근대 이전의 물질과 정신이 융합된 상태, 정신활동이 곧 물질의 변화와 운동과 연관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인 세계관을 포함시켜야 한다. 이는 시대의 변화를 집단적이지 않은 철저히 개인적이며 독자적인 활동으로 대응하고 응답하려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 세계와 세계가 조우한다. 

 

현대 회화 분야의 많은 작가들이 존재와 실존의 문제,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 주체와 타자의 문제 등을 전통적인 조형의 어법을 벗어나 보다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접근한다. 이미지는 이러한 존재와 부재 사이의 긴장이 드러나는 표면이다. 우리는 김수연 작가의 작업에서 세계와 진실의 부재를, 박광수 작가의 작업에서는 실존, 희망, 꿈의 부재를, 그리고 위영일 작가의 작업에서는 작가의 신화, 현대예술의 권위와 아우라의 부재를 읽는다.  

 

이미 현대 회화는 조형의 마술적 경이나 심미적 쾌락을 주는 시대를 해체한지 오래 되었다. 한 작가의 예술활동과 그 결과물은 거의 개인의 독자적 신앙, 제의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합리적 분석과 상대적 평가란 무의미해진다. 더 이상 어느 작가의 이미지가 더 우수하다거나 더 심오하다는 식의 감상과 평가의 시대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조형의 경험에서 실존의 경험으로 나아가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과거의 관습을 버리지 못한채 엉거주춤 서있다. 과거와 현재의 회화는 겉모습은 닮았으나 그 본질은 완전히 변화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의 감각과 감성은 매우 불규칙하게 앞서가거나 아니면 뒤로 물러난다. 진보와 퇴보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잡탕 속에서 이들이 집중하는 이미지를 만나는 것이다. 현실은 이질적인 힘과 흐름이 끝없이 충돌하고 섞이는 세계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회화는 스스로 그 내부 또는 그 중심으로부터 해체되고 완전히 과거의 일체를 일소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기란 요원하다. 작가는 그 과정을 관통하며 인간의 감정, 개인의 생동하는 감정의 변화를 기록하고, 재현하고 표현한다. 현실을 재현하는 과정에 작가는 자신의 이념과 성찰과 감각과 감정이 분해되고 융합되는 과정을 무수히 겪으며 조금씩 형성된 이미지를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히 표현이라거나 일루젼이라는 관념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진실과 지혜로 도약한다. 

 

지난 시기의 미술사가 우리에게 알려준 지혜는 가상(일루젼)의 차원에 존재하는 회화의 세계가 분명한 새로운 현실로 현존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과 실천으로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예술적 사건이란 미래의 의미와 새로운 차원을 현재로 소환해 온 것이다. 이들 3인의 작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가상의 형식으로 미래의 실존과 만나는 사건을 향한다. 예술적 의미는 시간에 묶여 있어서 언제나 사건이 벌어진 현재가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전달된다. 

제 5회 종근당 예술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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